한다엘 연애자존감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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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난 첫눈에 반해야만 사랑인 줄 알았어

한다엘 2021. 8. 14. 23:02

운명은 무슨, 사람 보는 눈이나 기르자

 '그땐 참 어렸지' 싶은 순간이 있다. 20대의 나는 꿈에 대한 포부, 연애에 대한 고집, 직장인에 대한 동경, 결혼에 대한 환상까지...지금 생각해보면 참 시야가 좁았다. 한편으론 철없던 내가 그립기도 하다. 그런 어린 생각들은 그 나이였기에 가능한 것이고 그때만 할 수 있는 특권 같은 것이다. 20대를 지나 30대 중반을 향해가는 지금. 또 다른 십 년 뒤, '그땐 그랬지...'라며 지금의 나를 회상하기 위해 이 글을 씁니다.

 

 사랑을 인터넷 소설과 드라마로만 배웠던 어린 시절. 처음 본 남녀가 첫눈에 사랑에 빠지고, 밤새 통화하고 매일 만나며 서로에게 귀엽게 집착하는 모습이 진짜 사랑이라 굳게 믿었다. 

 

 그때의 내가 무지했던 점은,

1. 미디어는 정해진 방송시간 내에 주인공들의 감정 변화를 보여줘야 한다. 연출이나 상황 설정이 극적일 수밖에 없고 연인 관계의 단편적인 모습만을 보여주게 되는데, 실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상적인 일들은 항상 극적일 수 없다. 
2. 사랑에 빠지는 속도와 애정의 크기는 비례하지 않는다. 사랑 표현 방법은 이 세상의 연인의 수만큼이나 다양하다. 사랑에는 정답이 없다. 

 

 그래서인지 대학생 때는 은은하고 꾸준하게 애정을 보여주는 사람보다 과감하고 화려하게 사랑 고백하는 사람에게 더 큰 호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멋진 누군가 내 앞에 나타나 운명처럼 첫눈에 사랑에 빠지게 되길 꽤 오랜 시간 기다렸었다. 희한하게 모든 일들이 둘이 만날 수밖에 없도록 흘러가거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둘은 이미 수년 전에 인연이 있었다거나 하는 마법 같은 일들은 흔하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그리고 그 기대를 버리기까지 정말 오래 걸렸던 것 같다. (대략 29살 때까지 기대를 놓지 않았다.)

 

 그 기대를 미련 없이 버리게 된 계기는 여러 번의 소개팅과 헌팅을 경험하면서다. 클럽이나 술집에서 같이 놀자며 다가오는 사람, 길거리에서 번호를 물어보는 사람, 카톡으로 말 거는 낯선 사람, 나의 지인에게 내가 너무 마음에 든다며 소개해달라고 졸랐다는 사람... 이들의 접근방식은 분명 내가 원했던 운명적인 상황이 맞긴 한데 이들과는 항상 석연찮게 끝나 버렸다. 이들의 공통적인 연락 패턴은 이랬다.

 

1. 나의 단편적인 모습(프로필 사진, 스쳐가는 모습)만 보고 다가옴("너무 예쁘셔서..", "이상형입니다")
2. 낯선 상황에 내가 경계하면, '이상한 사람 아니다'며 급 자기소개 시작("회사 어디 다니고요", "이 근처 살아요")
3. 초반 연락에 열정적인 모습을 보임. 실시간 카톡, 전화 등
4. 연락만 하고 있는데도 "바로 내가 찾던 이상형인 것 같다", "결혼도 생각할 나이라서 진지하게 만나보고 싶다" 등 앞서가는 멘트
5. 장단을 맞춰주지 않으면 갑자기 잠수

 

 이런 과정을 겪으며 누군가에겐 일생에 한 번뿐일 수도 있는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특별한 일이 어느 누군가에겐 일상적인 일일 수도 있겠다, 이성에게 호감을 느끼는 속도는 지극히 개인적인 차이일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내가 그들과 특별한 인연이어서 그들이 첫눈에 반한 것이 아니라, 그냥 그들은 누구에게나 쉽게 첫눈에 반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물론, 호감 있는 이성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용기 있게 고백하는 건 진정 멋진 일이다. 진심으로 마음이 있는 단 한 사람에게만 고백한다면 말이다.

 

 깨달음을 얻고 나니, 내가 내 자신에게 참 무책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인'은 가족보다, 절친보다 더 가깝게 지내며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사람인데 그 역할을 '운명'이라는 미신 같은 말에 기대어 우연한 기회에 만난 사람에게 주려고 했다는 게 말이다. 나와 성향이 맞는지, 내 자존감을 깎는 사람은 아닌지, 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사람인지 꼼꼼히 맞춰봤어야 하는데, 그 과정들을 훅 건너뛰고 '첫눈에 반했다', '이건 사랑이야'라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내 인생을 베팅하려고 했던 거나 다름없었다.

 

 그 이후 스스로에게 책임감 있게 행동하기 위해 나만의 기준을 만들었다. 소개팅은 나를 잘 아는, 믿을만한 주선자에게만 받고 소개팅이 들어오면 내가 정한 이상형 안에 있는 사람(비흡연자, 나와 비슷한 학력, 나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 등)만 만나기. 썸은 '삼프터 법칙(세 번 만나고 사귄다)'에 얽매이지 말고 상대를 충분히 알았다고 생각할 때까지, 확신이 들 때까지 타기. 그 중간에 상대가 포기한다면 나도 미련 없이 놓아주기... 

평범한 만남이고 특이할 것 없는 연애지만,
난 이 관계에서 특별함을 찾아가기로 했다.

 

 운명이란 것도 별게 아니다. 우연을 운명으로 믿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에겐 그 자체가 운명이 되는 것이다. 영화 같은 특별한 만남이 아니더라도, 이 수많은 인구 중 둘이 만나게 됐다는 것이 이미 기적이다. (그렇게 믿고 살아가자.)